절기를 실감나게 보내는 네 가지 방법 백로
조금 뻔하지만, 하늘이 정말 높고 맑습니다. 날씨가 뭐길래 사람을 들뜨게 만듭니다. 과거 이때가 되면 고된 여름농사가 끝나고 잠시 일손을 쉰다고 합니다. 과거에는 시집살이를 하던 며느리도 원래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만약 현재도 이 시기가 휴가철이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여행갔다 싸우는 일은 줄지 않을까요? 짜증은 물러가고 아직 가을을 타긴 이른 지금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
|
|
지극히 사적인 가을
아침, 저녁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 선풍기와 에어컨 없이 잠을 잔다. 새벽녘에는 창문 넘어 들어오는 바람에 발치의 이불을 찾게 된다. 아직 한낮의 더위가 세게 버티고 있지만 처서 이후 한낮의 열기도 그전만 못하다. 한여름에는 힘겨울 정도로 숨을 헐떡거리던 꽃순이도 숨이 조금 얌전해졌다. 마당 잔디에 내린 이슬이 출근하는 신발에 스쳐서 샌들 사이로 살짝 물기가 스미기도 한다. 아침, 저녁은 가을인가? 하다가 낮 더위로 아직은 가을을 느끼기에 너무 이른 시기인 것을 깨닫는다. |
|
|
백로에는 밤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힌다고 한다. 밤공기가 차가워져 공기의 포화수증기량이 감소하여 공기가 포화상태에 도달하고 응결되어 이슬이 맺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무슨 말인가 이해되지 않아 읽고 또 읽어보니 사람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감정도 포화상태에 도달하면 더 이상 마음에 감추지 못하고 밖으로 새어 나온다.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사랑이든, 미움이든. 이 마음 그릇의 크기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밤공기가 달라지듯 상황에 따라 크기가 달라진다. 여유가 있을 때는 감정도 포화상태에 천천히 도달하고 표출도 천천히 되더니 여유가 적어지니 감정의 포화상태도 즉각적이다. 이게 이슬이라면 햇빛에 말리면 되겠으나 밖으로 튀어나온 감정은 어디 말린다고 사라질까? |
|
|
햇볕 한 줌, 바람 한 가닥, 푸르게 변하는 하늘, 인적이 드믄 바다에 마음이 흔들린다. 가을은 사람을 점점 센치멘탈하게 만든다. 아직 본격적인 가을로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렇게 흔들려서야.
|
|
|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스티븐 유니버스>
쉬면서 무언가를 보겠다는 결심
앞에서도 말했지만 휴가철이라던 여름보다도 쉬기 딱 좋은 절기입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그랬다니깐요?) 그래서 오늘은 그에 맞춰 큰 자극없이 볼 수 있는 영화를 가져왔습니다. 또 오늘은 큰 결심을 하고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하나 가져왔는데요! 제게 '휴식'하면 이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기에 가져왔습니다. 그럼 오늘 하루는 완벽한 쉼을 즐기시길 바랍니다
|
|
|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 Big Fish, 2003
로맨틱 코메디를 좋아하시나요? 저는 그렇게 즐겨 보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로코'가 주는 휴식이 있습니다. 힘들이지 않고 연애에 대한 대리만족을 시켜준다고나 할까요? 휴식이 필요한 날 달콤한 로코 한편 봐 보세요! 로코가 조금 부담스럽다면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는 일 중독인 상사에게 시달리는 하퍼와 찰리가 두 상사가 연애를 한다면 자신들이 조금 덜 힘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두 상사를 연인으로 만들려고 계획을 세우는데요! 그 과정에서 하퍼와 찰리에게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관계, 연애, 우정 모두 인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영역일까요? 로맨틱한 관계를 넘어 사람 사이에 대한 가볍지만 통찰력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입니다. |
|
|
<스티븐 유니버스> Steven Universe, 2013
<스티븐 유니버스>는 크리스탈 젬 가넷, 애머시스트와 펄 그리고 주인공 스티븐 유니버스가 함께 외계 문명으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내용을 담은 애니메이션입니다. 단편적인 에피소드부터 큰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스토리까지 두루 즐길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을 고르자면, 모든 인물들이 약간씩의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은 스티븐 유니버스는 정의감에 불타지만 열정이 앞서 미숙할 때가 많습니다.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그리운 고향별과 사랑했던 연인 앞에서는 무너지고 마는 인물, 장난기가 심해 의도치않게 상처를 주는 인물 등 우리 주변에서 몇번이고 마주칠 법한 캐릭터들이 서로를 볻돋고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있자면 복잡했던 생각과 마음도 차분해집니다.
하지만 더욱 사랑에 빠질 수 없는 건 바로 '삽입곡'입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좋아했던 엔딩곡을 남기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
|
|
백로
이시기는 늦더위를 식혀줄 비가 오지만
뜨거운 여름은 여전하다.
그것은 지난 여름 기억의 조각이다.
이베리아 반도 포르투갈을 여행했던 2023년의 기억.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책 두권이 그 기억을 더한다.
『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 주제 사라마구, 박정훈 옮김
『수도원의 비망록』, 주제 사라마구 지음, 최인자 외 옮김
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
내 유년의 여름은 쓸쓸하고 외로웠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여름방학 내내 혼자였거나 큰아버지 댁이 있는 섬으로 보내졌기 때문일 것이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의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 작은 기억들’은 그의 유일한 회고록이다.
88살에 먼지가 된(그는 무신론자다. 신은 인간의 의식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의식이 사라지면 신도 사라진다고 말했다) 대문호가 인생 전 시기가 아닌 유년기의 회고록을 책으로 출간한 이유가 뭘까? 유년기의 기억들이 착각이거나 잘못된 내용이 많을 것이지만 아마도 대문호가 생각하는 유일한 순수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사라마구는 이 책에서 다양한 유년의 기억을 서술한다. 그런데 그의 독특한 문체이기도 하지만 유년기는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다. 살았던 동네와 거리 그리고 사건의 시기는 뒤엉켜 있고 서술도 친절하지 않다. 사건은 반복되기도 하고 번복되기도 한다. 그의 작은 기억들은 어쩌면 틀린 기억이거나 뇌의 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혼돈의 유년기를 가장 솔직하고 진진하게 기록하고 서술한다. 심지어 조작된 기억도 그대로 서술하거나 오히려 진짜로 설명한다.
과거의 모든 기억을 사실만으로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사라마구의 진짜 기억을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유년의 그 사건은 기억의 사건으로, 기억 속에서는 진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잘못된 기억이 현재의 나를 제대로 만들 수도 있다.
수도원의 비망록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어느 도시를 가도 만나는 성당과 수도원. 그 건축물들의 육중함 앞에 서면 인간은 왠지 작아진다. 하지만 사라마구의 이 소설 ‘수도원의 비망록’을 통해 하늘에 맞닿는 인간의 의지를 만나는 순간, 우리의 왜소함은 사라질 것이다.
마프라 수도원 건립을 둘러싼 이야기인 이 소설은 유럽의 거대한 성당과 수도원이 어떻게 건축됐는지를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작가인 사라마구는 수도원 건립보다 더 한 숭고한 사랑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는 종교라는 권력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인간의 이야기다. 인간의 신앙으로 건립되는 수도원과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진 하늘을 하는 기계. 유럽의 종교 권력을 은근히 비판해 온 사라마구는 인간 의지를 통해 하늘에 맞닿을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소설은 그렇게 쉽게 결론으로 가지 않는다. 인간의 의지도 결국은 한계가 있기 때문일까? 전쟁터에서 손목을 잃은 발타자르와 마녀사냥으로 어머니를 잃은 이방인 여자 블리문다. 사라마구는 그 유명한 불친절한 문체로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 2023년 여름에 읽은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는 결코 아름답게 끝나지 않았다. |
|
|
가을의 초입에서 경험하는 일상과 비일상의 공존,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가을의 시작, 백로입니다. 밤의 기온이 내려가고 새벽에 맺히는 이슬이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케 한다는데, 가을의 기운보다는 끈질긴 여름이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곧 가을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안겨주며 더위에 지쳐가는 몸을 다독여주곤 합니다.
선선한 기운이 문득 느껴질 때는 괜히 책을 찾게 됩니다. 끈적한 여름 동안은 쉽게 내키지 않았던 편안하고 늘어지는 독서가 그리워질 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고, 9월은 독서의 날이 된 듯합니다.
백로는 독서의 달, 9월을 들어서는 가장 첫 절기입니다. 오늘만큼 독서의 의지를 다시 불태울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것입니다.
아직 우리에게는 종이책이 익숙하지만 종이책만이 독서의 방법은 아닙니다. 미래인 듯 이미 도래한지 오래인 전자책, 먼 과거에서 쓰였던 파피루스, 점토판까지. 사람들이 읽어왔던 재료는 시간에 따라 변화했지만, 변하지 않았던 것은 유용한 정보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엄격한 법도 모두 글자를 통해 전달되었다는 것입니다.
글자가 계속 존재하는 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죽지 않고 살아 전해지는 것입니다.
지난 6월,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인천에 개관했습니다. 프랑스 샹폴리옹 박물관, 중국 문자박물관에 이은 세계의 세 번째 문자 전문 박물관입니다. |
|
|
문자박물관은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3개 층 규모로 구성돼 있습니다. 박물관의 지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상설전시실이 박물관의 가장 깊은 곳, 지하 1층에 위치해 있는 것이 특이한 점입니다. 1층 출입구로 들어선 관람객은 벽면의 곡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지하로 향하게 됩니다.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채 문자의 기원 속으로 파고드는 셈입니다.
문자 박물관은 문자가 쓰이는 바탕, 종이를 컨셉으로 두루마미를 닮은 형태로 완성되었습니다.
문자박물관은 종이를 닮은 형태에서 그치지 않고 문자에서 파생된 이중성을 컨셉으로 발전했습니다.
여기에서 문자의 이중성이란 일상과 비일상의 공존입니다.
건축가는 일상적으로 쓴 일기가 시간이 흘러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이 된 <안네의 일기>를 문자의 이중성의 예시로 들었습니다. 무척이나 일상적인 요소이면서도 누적된 일부가 중요한 역사, 비일상적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문자박물관 또한 일상과 비일상을 모두 갖고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일상적인 공간이 외부 공원에서 비일상적인 공간인 전시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시퀀스가 박물관 설계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
|
|
종이를 닮은 구부러진 벽체는 자연스러운 시퀀스를 더욱 효과적으로 만듭니다. 공원과 전시공간 사이 즉, 일상과 비일상을 자연스럽게 넘은 방문객은 곡선의 벽을 따라 상설전시장까지 이동하게 됩니다.
공원에서 전시 공간을 지나 문자의 근원까지 도달하는 하나의 여정을 의도한 것입니다.
이제는 일상 같은 여름의 더위와, 아직은 낯설고도 반가운 가을의 선선함이 공존하는 백로입니다.
지금 읽고 있는 무언가가 유구한 역사를 노래하는 대서사시이던 누군가 새벽 공기를 맡으며 써 내려간 짧은 인생평이던 우리에게 문자로 전달되어 새로운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독서의 달을 맞아, 여름과 가을의 이중성을 맞아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을 찾아가 문자의 기원을 탐험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
|
|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인천 연수구 센트럴로 217
화-일 오전 10:00 ~ 오후 6:00
월요일 휴무 |
|
|
오늘 절기실감은 어떠셨나요?
아래 링크를 통해 의견을 남겨주실 수 있습니다! |
|
|
24절기가 양력이라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매해 같은 날짜인지도 모른 채 흘려보냈던 절기를 실감 나게 보내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일 년에 스물 네번, 격주에 한번, 당신의 메일로 절기가 찾아옵니다. |
|
|
|